청마기념사업회에서는 올해 청마탄생 10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첫날 청마연구학술 세미나에서 한국문단의 원로(元老)이신 신달자시인 특강을 개최하였다.
현재 한국시인 협회 회장인 신달자시인은 특강 순서를 소개하자 절뚝거리며 강단 앞으로 나왔다. 일주일전 발목을 다쳐서 도저히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존경하는 대선배 시인 청마를 기리는 축제에는 꼭 참석하고 싶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노라고 했다.

천둥 소쩍새가 그리도 울던 계절이 지나고 드디어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활짝 핀 국화의 계절에 청마선생의 예술혼을 기리는 문학축제 특강을 하게 된 것이 무척 영광이라는 인사말을 서두로 시인의 특강은 시작되었다.
시인은 지금의 시대에는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대라면서 진정한 시인의 역할은 잘 날지 못하는 갈매기가 있다면 그의 본성을 잘 이끌어 주어서 훨훨 날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의 집안은 어린 시절은 정미소와 제재소를 운영하는 대단한 갑부였다고 한다. 부잣집답게 별채에 지어진 호화로운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아주 크고 좋은 책상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책상 윗부분에 세 개의 서랍이 있었는데 그중 가운데 서랍은 늘 잠겨 있었다고 한다. 사무실에는 경리장부를 정리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도 아버지의 가운데 서랍 속은 한 번 도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시인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의 책상 가운데 서랍에는 많은 돈이 들어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사무실에 늘 큰 자물쇠로 잠겨있어야 할 가운데 서랍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필경 그 서랍에는 아버지가 관리하는 비자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누렇게 바랜 손때 묻은 낡은 공책 다섯 권이 있을 뿐이었다. 시인은 호기심에 노트 첫 장을 넘기니 ‘오늘도 외로운 하루였다’라는 아버지의 고백적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것은 세월의 이끼가 물씬한 아버지의 일기장들이었다. 그 서랍은 늘 고독한 아버지의 마음이 켜켜이 쌓여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혼자 있을 때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고독을 일기장에 적으면서 외로움을 삭히는 방법으로 평생을 사신 것이다. 이름하여 아버지는 등단하지 못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시인은 인간이 왜 슬픈가를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꿈을 쫒아 날고 싶지만 날개를 거세당한 채 삶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외로운 아버지. 아버지는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는 그 순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이 되는 것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갈매기처럼 새로운 삶의 힘을 굳건히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정신과 의사가 말하길 사람들이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유령 위장이 있어서 정서적 허기를 느낀다는 것이다. 시는 그 정서적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로써의 자정력을 키워나가는 힘을 길러주는 역할이어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정신오염에 시달리며 부대끼는 시대이기도 하다. 시는 이 정신오염의 시대에 방부제 역할이어야 한다. 시라는 고매한 정신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수혈되어서 더 좋은 환경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날개를 달아주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외롭고 고독한 아버지에게 시는 희망을 전하고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알려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면서 정신을 확장시키고 무딘 감각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 가을날 청마 시 한편을 암송하노라면 정서적인 허기로 외롭고 쓸쓸한 아버지의 유령위장에 포만감이 느껴질 것이며, 삶의 균형을 되찾게 되는 부가서비스 기능도 얻게 될 것이라며, 더불어 지금 이 순간이 올해의 가장 영광스런 자리로 여기고 싶다는 노(老)시인에게 참석자들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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