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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이순신 장군은 어디 갔나요?- 문화피서 공연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

김정희
/거제문예재단 관리운영부장

거제문화예술회관의 8월은 어느달 보다도 풍성한 공연일정으로 유명 문화 피서지로서의 이력을 더해가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개관 10주년이 되는 해에 걸맞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8월1일 막을 올리는 블루거제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하여 24일까지 청량감 넘치는 공연 일정으로 문화피서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 마지막 페스티벌로 8월 24일 무대에 올려 질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를 소개하고자 한다.

때는 1597년 어느 여름 밤 지칠 대로 지친 두 남자가 산길을 걷는다. 앞서 가는 이는 왜놈 무사 사스케, 뒤 따르는 이는 조선 명장 이순신이다. 사스케는 나무에 묶어둔 포로가 장군인지도 모른 채 정찰을 나가고 마침 명나라 군사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 한 막딸을 발견한다.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세 사람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는 난중일기에서 비어있는 3일이라는 공백에 상상력을 피워낸 픽션 사극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발설하지 말라던'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고구마 한 덩이에 눈을 희번덕거리는 욕쟁이로 둔갑시키는 반전이 이 뮤지컬의 매력이다.
거북선으로 왜놈을 무찔렀다는 성웅 이순신의 무용담과 위엄은 간데없다. 대신교과서의 역사를 배반한 욕쟁이 아재 이순신이 무대에 서있다. 광화문 한복판에 동상으로 서있는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비열한 왜놈 사스케는 고향 땅에 두고 온 여인 생각에 잠 못 드는 순정남으로 변신한다. 사랑하는 여인 요코를 담보로 출정을 명령한 영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사스케는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이국땅에서 숨어 지내다보니 고생이 말이 아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변변찮은 와중에 포로로 잡힌 사스케는 입만 열면 욕이다.

얼떨결에 곤경에 처한 조선 처녀를 구하다 입은 상처로 거동도 힘겹다. 하지만 이 처녀는 웬일인지 주위를 맴돌며 자꾸 먹을 것을 구해다 준다. 산수유와 자라만 먹이질 않나 틈만 나면 기대질 않나 의도가 의심스럽지만 살갑게 대하는 정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여자 주인공 막달은 순종이 미덕인 조선 여인이 아닌 능동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소녀로 변신시킨다. 난리 통에 가족을 모두 잃고 외톨이가 되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살아간다. 그녀의 초긍정주의는 세상을 일찍 깨달은 데서 오는 통찰에서 왔다. 중상모략만 일삼는 조정 대신들이나 왜놈이나, 명나라 놈들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집 나간 똥개 개념이를 찾아 나섰다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변을 당할 찰나에 사스케가 나타나 막딸을 구한다.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 왜놈이면 어떤가.
막딸은 짐승도 아니고 제 목숨 살려준 이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리로 상처 입은 사스케를 부축한다. ‘영웅을 기다리며’의 고아 소녀 막딸은 조선의 순종적인 여인상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능동적으로 삶과 사랑을 쟁취한다.

굶주림에 다 죽어가는 욕쟁이 아재와 잘생긴 무사를 먹여 살린 것도 막딸이 구해온 산수유와 칡이다. 역사는 남자들의 손으로 돌아간다지만 그 뒤에서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이순신의 결백과 사스케의 신의보다 지금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막딸의 고구마가 더 귀한 것이다. 비록 까막눈이라 이순신도 모르고 난중일기도 모르지만 눈물로 얼룩진 과거보다 현재에 충실한 막딸의 인생지론이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복을 움켜쥐는 것도 막딸이다. 그녀 인생에 봄이 온 것은 당연하다.

보통 해학극이 웃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도 감동과 교훈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 특징인데 이 공연은 굳이 무리한 감동을 이어붙이는 무리수는 두지 않는다.
그나마 한 줄 교훈을 건지자면 결국 왜놈도 영웅도 배고픔에 울고 고구마 한 덩이에 웃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영웅을 그리워한다. 지금 시대는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한 영웅이 필요한 세상이니까.

문화피서공연 마지막 날 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역사왜곡 코믹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에서 예술의 진정성과 다양성을 마음껏 느껴보노라면 진정한 피서가 될 것이다. 덤으로 전쟁 같은 일상이라는 삶에서 당신을 구해줄 영웅과 조우할 수도 있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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