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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면서…하담스님 /무이사 주지

내일이 곡우(穀雨)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곡우는 이제 햇차를 맛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마냥 행복해지는 절기가 된다. 아까 저녁에 있었던 소리꾼 장사익의 거제공연을 보러갔었다. 늦가을에 초가 지붕위에서 잘 여물어 둥근 박의 뽀얀 속살 같은 그 분의 소리느낌 때문인지, 울렁대는 기분이 아직 남아 쉬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조용히 홀로 앉아서 차를 마셔본다.

20여 년 전쯤이었던가, 밀양 표충사 앞에 있었던 통나무집이라는 찻집에서 같이 차를 마셨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었다. 사람들은 각자에게 맞는 인연을 짓고 살아간다. 내 자신은 매순간마다 맺었었던 수없이 많은 인연들 중에서, 차를 통하여 맺었던 인연들이 유독 소중하고 아름다웠었다는 생각이 든다.

1980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이었는데, 선배님을 만나러 갔던 부산 서면로타리 근처의 전통찻집 ‘다전’에서 난생 처음으로 차를 마셔 보았다. 차가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었고, 차의 맛도 처음인지라 그곳의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하고 불편하였다. 그런데, 서구의 과학문명을 동경하고 커피문화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던 20대의 젊은 내가 보았던 그 찻집의 풍경과 차를 마시던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멋있게 느껴졌었다.

뭔가 모를 진지함과 멋스러운 느낌을 주었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 훌륭하게까지 보이면서, ‘나도 차를 마시면 저렇게 멋있어지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나름 착각을 가지고 차를 마시기 시작하였고, 멋도 모르면서 멋있는 척 으쓱대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런 나의 착각이 내가 미친듯이 차를 마실 수 있게 하였었고, 그러면서 열렬한 차꾼이 되어갔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어렴풋이 차의 맛도 느낄줄 알게 되고, 차에 대해서도 막연하게나마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만의 차 생활을 갖게 되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세월을 보냈건만, 아직도 ‘차’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 차를 마시면서 ‘차에 대해서 조금 안다’라고 한다면, ‘차를 통해서 정직함과 인과의 법칙을 배웠다’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차’는 철저히 ‘하기 나름이다’라는 것이다. ‘어떤 차를 쓰느냐?’에 따라서, ‘어떤 물을 쓰느냐?’에 따라서, 혹은 ‘어떤 사람이 달이느냐?’에 따라서, 색향미로 구분하여 표현되는 차의 맛과 기운은 반드시 다르게 나타난다. 심지어 차 마시는 공간의 분위기와 그날의 기상상태, 또는 차를 달이는 사람의 건강상태와 기분과 정성에 따라서도 차의 맛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차를 우리면서 만나는 모든 과정의 요인들이 작용하여, 그 차의 맛이 결정되고 결과로 나타난다. 이것으로 ‘인과와 인연의 법칙’을 알게 해준다. 차는 있는 그대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정직하다고도 표현이 될 수 있다.
저번 주에는 김해에 사는 ‘차 동무’들과 오래간만에 ‘차 자리’를 만들어서 ‘차담(茶啖)’을 나누었다. ‘차 동무’는 오랫동안 같이 차를 마셔왔던 사람을 말한다. 흔히들 ‘차 벗’, ‘차 친구’, ‘다우(茶友)’, ‘차 도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냥 우리들끼리는 ‘차 동무’라는 말이 보다 순수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차 자리’라는 말도 차를 마시는 장소라는 뜻과. 어울려서 차를 마시는 ‘차회(茶會)’의 의미도 함께 갖는다.

‘차담’은 ‘차 자리’에서 나누는 차에 대한 이야기와 차를 마시면서 할 수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날의 차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차를 다루는 행다(行茶)의 주인인 팽주(烹主)가 정성스럽게 차를 달여서 차손님들에게 차를 마시고 그 차에 대한 ‘품다(品茶)’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차 예절로 여긴다. 그날의 팽주가 내어준 여러차 중에서 보이차를 마시다가, ‘이 차는 목에 걸린다’라고 말을 했다. 그 때, 옆에서 차를 마시던 차 도반이 ‘스님! 차가 목에 걸린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런 표현은 팽주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가 목에 걸린다’는 표현은 그 차의 맛이 좋지 않다는 뜻과, 차를 마시는 사람의 몸에 나쁠 수 있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내어준 팽주에게 무안을 주게 되고 실례가 된다는 것이다. ‘차는 원래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품다도 각자가 느낀대로 정직하게 해야 된다. 정직하게 품다를 하는 것이 최대의 배려이며, 최고의 예의가 될 것이다’라는 나의 주장과 그 도반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정직함’과 ‘예의’와의 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품다를 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답이 없거나 답을 내릴 수도 없는 분별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에 당연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었지만, 누구보다 차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행복했던 차 모임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냥 차를 마신다. 굳이 차를 마시는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차를 마실 수가 있다.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했던가? 다가오는 초파일에도 좋은 우전차로 부처님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중에게 차 공양을 올려야지!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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