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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자- 바른정법, 바른인연(12)

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불교를 얘기하자면 ‘부처되는 종교이다’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부처되는 종교라는 말이 아주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너는 중생(衆生)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내버려두는 종교가 아니라, “너는 아직 깨치지 못해서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너는 꼭 부처가 되고 만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희망적인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우리들에게 사주나 관상, 부적 등인 법(法)이 아닌 것에 호기심마저도 갖지 말며, 아예 보러 다니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주보고 관상 보러가는 마음은 이미 나는 사주나 관상에 지배받는, 즉 운명에 지배받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한정지으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그러면 우리들은 자신을 무엇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반야파라밀다(般若波羅蜜多)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나무’란 말은 ‘귀명(歸命)’,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의지 하느냐?”하면 참 생명의 세계인 아미타의 세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불자라면 반야심경(般若心經)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라고 했습니다.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자’라는 뜻이고,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고 했습니다.

걸림이 없다는 말은 장애(障碍)가 없다는 것이고, 즉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구속도 받지 않습니다. 운명(運命)이라든지, 사주팔자라든지 그 어떤 것으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그 어떠한 작용도 마음에 걸림이 없는 절대 자유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절대 자유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이루어집니다. 반야는 부처님의 깨치신 안목인데, 그 안목으로 보니까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반야바라밀다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는 겁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세계는 절대무한의 세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극락세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숙된 세계입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어디로 찾아가야 할 세계가 아닙니다.
앞에서 불교는 ‘부처되는 종교’라 했습니다. 아직 부처가 아니고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될 것인가? 하는 확실성이 없기에 걸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게 되면,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이미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다’가 아닙니다. ‘부처가 될 것이다’가 아니고 이미 부처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이미 부처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이라면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특히 연말 동지 전후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사주팔자를 묻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반야심경을 말씀하신 불보살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부정해 버립니다. 그것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에 아무런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의사가 당신에게 “당신은 지금 00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라고 해도 그것은 의학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일 뿐입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내가 00바이러스에 감염된 게 사실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참 생명은 본래부터 절대무한이기 때문에 그런 00바이러스 따위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미 마음에 흔들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이미 나는 본래 반야바라밀다의 생명을 살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 광명이 밝아져서 완전히 깨치지는 못했지만, 이미 ‘반야바라밀다의 생명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치신 부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까, 어떤 병에 걸렸다고 의사가 말은 해주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 생명 자체가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내 생명은 절대무한인 아미타이기 때문입니다.10여년 전 서울 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초췌한 얼굴로 찾아와서 “스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울면서 매달리는 겁니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어보니 젊은 보살이 자궁에서 시작된 암이, 폐, 간, 유방 할 것 없이 몸 전체에 전이가 되어 항암제를 투여한다 해도 얼마 살지를 못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실컷 울고, 내일부터는 내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하고는 법(法)을 일러주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무슨 기도하면 됩니까?”하고 묻길래 보살에게 맞는 기도문을 주고, 경전(經典) 독송과 더불어 사경(寫經)도 하게 하였습니다.새벽기도 동참 후, 젊은 보살은 부처님의 가피로 회복되었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엔 건강한 몸으로 야채밭도 가꾸면서 양수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의 인연으로 아직도 연중 절 행사에는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 의사가 뭐라고 선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우리가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지배를 받지 않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듯, 종교라고 하는 것은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궁극의 의지처를 찾아가는 이유는 절대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절대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바로 절대 자유의 주체로서 내가 확립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걸림이 없게 됩니다. 불자라면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무한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반야바라밀을 믿는 사람이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여러가지 다른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어느 누구에게든지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용기와 희망 그 자체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을 모신 곳에서 띠삼재를 통해 겁이나 공포를 줄만한 얘기를 한다거나, 사주가 안좋다거나, 조상 천도재를 지내주지 않으니까 어떻고, 삼재풀이 기도를 해야만 액운을 벗어나고, 부적을 소지하게 하는 그러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불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합니다. ‘시무외자’라는 말은 ‘두려움을 없애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름표를 붙인 분이 따로 계셔서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처님 법(佛法)에 의지하게 되면, 즉 다시 말해서 이미 절대 무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모든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여러분들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시무외자’, 이것은 불교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두려움과 공포심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여러분, 바른 정법으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시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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