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와도 같던 실명 뒤 찾아온 두려움과 분노

‘홀로 서라’는 한마디 충고에 결심한 계룡산 등반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소개되면서 일약 희망아이콘으로 떠오른 박근현(50)씨. 그는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완전히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계룡산 정상까지 오르는 용기와 의지를 보여 시청자들에 진한 감동을 전했다.

지난 10일 아침, 박근현 씨를 직접 만나 ‘어둠’을 이겨낸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시력을 빼앗은 것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 29세에 첫 진단을 받았지만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당시엔 의사도 병명만 알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병이었기에 딱히 대처할 수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 병은 조금씩 악화되기에 실명시기를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박 씨의 경우 계단식으로 시력이 뚝뚝 나빠졌다. 괜찮다가도 어느 순간 급격히 나빠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완전한 실명은 3년 전에 찾아왔다. 직장에서 발생한 사고로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그는 다음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실명에 회사는 휴직을 권고했고 그는 3개월간 집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3개월간 집에서 뒹굴다보니 미칠 것 같았죠. 뒷골이 터질듯이 뜨겁고, 위가 쿵쾅거리고, 잠은 쏟아지는데 깊이는 못자고. 끝내는 아내에게 ‘나 스스로 죽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 와중에 생각난 것이 충혼탑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마구 날뛰면서 울분을 토하고 싶었단다. 충혼탑 계단 앞까지만 아내의 도움을 받았고 계단은 혼자 올랐다. 마음먹은 대로 소리 지르고 욕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차츰 분노가 사라지자 들입다 날뛰고 싶어 졌다. 3개월간 집에 있으면서 온 몸이 쪼그라들고 다리가 많이 약해졌다. 그러나 넘어지거나 부딪힐 것이 두려워 뛰지 못했다. 몇 걸음만 걸어도 방향을 잃고 충혼탑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걷는 연습부터 했다. 일직선으로 걷는 게 느껴지자 원하는 지점에서 좌향좌, 우향우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3개월 뒤에는 집에도 혼자 갈 수 있었다. 집에서 충혼탑으로, 충혼탑에서 집으로 오고 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위험한 게 문제가 아니라 뭔가 해야겠다는 의지가 컸었습니다. ‘죽으면 죽겠지’라는 자포자기 심정도 한몫했었죠.”

충혼탑에서의 3개월은 체력뿐 아니라 친구도 사귈 수 있는 기회였다. 이곳에서 그는 ‘삼촌부대’라 불리는 한 노인모임을 만났다.

“자수성가한 지역 어르신들인데 ‘결국 혼자해내야 하는 일이다’라고 직언해주시더군요. 성공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 말이 산에 오르게 된 계기가 됐다. 시력을 잃고 6개월이 흘러 세운 첫 목표이자 각오였다. 정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가까운 거리부터 왕복하면서 거리를 쟀다. 지형을 익히고 걸음을 세면서 ‘숫자’에 강해졌다. 힘들면 멈춰서 행인들에게 길을 찾아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1년 동안 계룡산 약수터까지만 다녔다.

“운동을 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1년여 동안 회사 원망만 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회사에서 일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었고 아직 기다려주는 것에 매우 감사히 여겨졌죠.”

그는 지난해 5월 상춘객들이 붐빌 때 정상까지 올라갔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등산객이 많은 시기를 선택했다. 왕복으로 5시간 반이 걸렸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눈을 감고 산에 올라보면 볼게 더 많습니다. 바람소리, 새소리, 햇빛이 매번 다르고, 좋은 생각으로 산을 오르면 더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조행성 기자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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