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S가 꽃배달을 해 주었다. “아침마다 밤새 잘 잤느냐는 인사를 건네고, 물을 줄 적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는 문자에 기반한, 명향이 느껴졌다.

지난해 가을 화훼 농장을 운영하는 시인으로부터 분재 세 개를 얻었다. 피라칸타 한 그루에다 명자 소분(小盆) 두 개를 딸려주었다. 자산을 선뜻 선물하는, 이의 마음씀이 붉은 열매만큼이나 근사했다. 나도 흉내 내고 싶어 그 중 하나를 이웃 손에 쥐어 보냈는데, 춘분 지난 오늘 꽃피워 기별을 한 것이다. 돌아보니 나의 명자는 아직도 우듬지와 가지에 찬바람을 묻히고 있었다. 주인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중인 그 위에 한 소녀가 떠올랐다.

청소년 대상 특강 시간이었다. 예정된 짧은 시간에 문학을 제대로 말할 수 없어 일화 하나로 그것을 대변하는 방법을 썼다. 나의 흠모남, 도스토예프스키를 꺼냈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인생론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시베리아 유형지에 관한 대목이다. “그가 마침내 사형대에 올라섰을 때 마지막 5분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그 짧은 순간을 값지게 쓰고 싶었다. 고민 끝에 결정을 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해 준 신께 감사하고, 동료 사형수들과의 고별에 2분, 나머지 1분은 땅, 자연에 감사하기로 했다.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2분이 지나 버렸다. 운명의 시각이 3분 앞으로 다가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난 28년을 금쪽 같이 살지 못했음에 후회막급이었다. 아, 다시 한 번 삶이 주어진다면,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때 말발굽소리와 함께 들리는 사형집행 중지명령 소리...” 작가의 체험이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를 했다. 긴장감 있는 실화가 호기심을 자극했던지 학습자들의 호응이 좋았다. 앞자리에 앉은 한 학생만이 책상에 엎드린 채 수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럴 경우 질문의 대상은 당연히 그 학생 몫이 된다. 아이는 방금 언급한 작가 이름을 묻는, 간단한 물음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몇 분 기다려 주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되려 나에게 원망의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나중에 당담교사로부터 간략한 정보를 들었는데 그 내용을 이루는 단어들이 ‘결손가정’ ‘폭력’ ‘내 놓은 아이’ ‘소귀에 경 읽기’ ‘가출’ 등이었다. 또래들이 꿈의 틔우기 위해 양질의 거름과 수분 역할을 하는 명작의 모태를 경청하고 있을 때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된 채 무기력증을 보인 이유, 그것을 환경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보호자의 관심부재가 학교생활 부적응, 사랑의 매마저도 금지된 교사들의 체념, 이 같은 경우는 환경결정론의 전형적인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김동인 소설(감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칠성문 밖 빈민촌에서 살던 복녀는 처음에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차츰 본래 성질을 잃어가면서 매춘을 하고, 이웃집 왕서방을 살해하게 된다. 피치 못할 환경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인간은 결국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론에 화원 주인의 귀띔도 설득력을 실어주었다.

화초를 사면서 사람들은 대개 물을 1주일에 몇 번 주느냐고 묻는다. 날짜를 정해놓고 수급한다면 화초농사는 망치게 된다. 휴면에 들어간 동절기에나 갈증이 심한 하절기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만 물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전자의 경우는 수분 과급으로 뿌리가 썩어 죽고, 후자의 경우는 말라 죽는다. 관수방법, 비료, 병충해 예방에도 소홀하면 안 된다. 식물은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인생과 흡사하다는 말이었다.

화초가 입으로 채근하지 않는다 하여, 신생아처럼 배고픔, 배뇨유무, 졸음 등의 신호를 울음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하여 나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잎의 처짐은 수분 부족을, 마디간이 길어지고 잎이 커짐은 햇빛 부족, 잎이 누렇게 변하거나 떨어지는 현상은 양분 부족이라는데, 실내 화초들의 미세한 몸짓 언어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식물농사와 자식농사는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며 책임을 지는 것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데, 토질불량 신호를 보내는 정원의 휘어진 나무에게 외양만 탓한 꼴이었다.

혹여 소녀는 '인터넷 가출카페'나 음습한 골목을 헤매면서 결핍을 매우고 있지 않을까. 국내 한 유명 포털사이트에 '가출' 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자 수 십 개에 달하는 관련 카페가 나타난다. 잠잘 곳을 제공해 주는 대가로 ‘성생활’을 함께 해야 한다는 17세 소년의 글부터 가출조직을 만들고 싶다며 연락처를 올려놓은 게시물도 있다. 불량한 태도와 참한 얼굴이 대조적이던 소녀를 걱정하듯, 나는 헐벗은 명자를 바라본다.

일회성의 인생은 교수대 위에서 유효한 5분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시간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한다. 이 때 보호자 역할은 밥과 같다. 밥의 생물학적 본질은 논리적일 수가 없다. 무조건 주어야 하는 것이며, 먹고 안 먹고의 차이는 크다.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 명자꽃. 그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새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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