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비 오는 날에윤석희

“정말 예쁘다. 리본까지 달렸네.”

칭찬을 해주니 꼬마 입이 바로 귀에 걸린다. 기실 장화라기보다는 멋진 부츠 같다. 집을 나서기 전 나도 신발장을 열었다. 승강기에서 마주친 아이처럼 장화를 신을 요량이었다. 허나 손을 내밀다 그냥 닫고 말았다. 동선이래야 뻔하지 않나. 포장이 잘된 도로에서 건물이나 차까지가 고작이다. 거기선 굳이 필요가 없다. 내 것 역시 쇼윈도에 진열돼 있던 근사한 장화가 아닌가.

한동안 소용이 줄어지면서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 특수한 곳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만이 방수를 목적으로 신는다. 허나 장화가 요즈음 한창 뜬다. 신발 가게는 물론 구두 매장에도 보인다. 심지어 옷가게나 패션 용품 전문점에서까지 판매한다. 비 오는 날이면 옷과 장화 아니 우산 까지 코디를 해서 거리를 활보하는 멋스런 여인들이 넘쳐난다. 생활의 풍요와 감각이 어우러져 우중 도심풍경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유행의 봇물이 터졌나보다. 색깔도 모양도 길이도 어찌나 세련되고 다양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용도 폐기되어가던 장화를 다시 찾게 하고 비 내리는 날의 분위기를 확 띄워 놓은 아이디어맨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씁쓸하다. 패션 장화에 밀려 버림받은 구닥다리 내 장화에 눈이 간다. 시커먼 게 모양새도 투박하여 홀대받지만 삶의 이력이 묻어나던 것이다. 외양에 현혹돼 주저하지 않고 새 걸 사두긴 했어도 선뜻 신고 나가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 그걸 신으면 함부로 나댈 수 없고 억지로라도 멋쟁이 노릇만 해야 될 듯하다. 비신은 물론 작업화로서의 기능도 잊은 겉 매무새만 매끈한 것이 내키지 않는다. 정이 가지 않으니 신발장의 진열품 구실밖에는 못한다. 앞으로도 이 장화는 신을 수 없을 것 같다.

논에서 농부가 땀을 흘린다. 허벅지 까지 긴 장화가 붙어있다. 발을 젖지 않게 하고 거머리도 막아 주질 않나. 갯벌 속으로 배밀이 해 들어가는 갯사람들의 장화도 떠오른다. 세차장 아저씨, 수산시장 아주머니, 도살장 인부들까지 내 검정 장화를 더 좋아할 것이다.
농장에서는 나도 늘 신는다. 비신이 아니라 일상화인 게다. 축사에서 신기도 그만이다. 분뇨장도 게이지 않는다. 풀 속에 뱀이 두려울 때 필수고 신 타고 들어오는 벌레들의 공격에 방비책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에서 장화 없인 못산다는 말까지 있었다. 더러움도 무서움도 주저함도 막아주는 요술 신이였던 거다. 그 중 내 검정장화가 으뜸이었다. 용쓰지 않아도 쑥 들어가고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도 불평이 없는 놈이다. 애써 씻지 않아도 되니 무던하지 않은가.

최운씨의 수필 장화를 읽은 적이 있다. 그걸 신은 여자라면 알뜰하면서 포근하고 남자라면 수더분하면서도 용기가 있을 거며 진국이라는 거다. 해서 손자 녀석에게 장화 신는 여자를 찍으라 하겠다는 것이다. 장화 신는 이들의 성정이 소박하고 바지런한 생활인이라는 데 크게 공감했다. 그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힘들여 그분을 찾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장화 신은 사람에게서는 삶의 진정성과 땀의 신성함이 묻어난다. 활기차게 살아가는 건강함도 감지된다. 그걸 신고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기만하여도 흐뭇하다. 진한 삶의 냄새를 현장에서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정작 그걸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비가 오면 일에서 빗겨서 한가해진다. 더러 여유도 찾지만 창에 부딪히는 비 눈물을 보며 공연히 마음 한편이 쓸쓸해진다. 작정 없이 쏴 다닐 수밖에 없다. 이때 장화가 그만이다. 금방 발에 날개가 돋는 것이다. 울적함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무데라도 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다. 왠지 모를 해방감까지 만끽한다. 기동력도 살아난다. 휩쓸고 다니면서 온 세상을 빗물로 씻어내며 청소하는 기분이다. 마음까지 정화되어 신선해진다. 잘박거리는 물소리에 발에 걸린 자유가 기쁨이 된다. 조심성을 접어두고 활달해 질 수 있으니 얼마나 신이 나는가. 수렁에도 물고랑에도 푹푹 빠져보는 재미라니. 달리는 차에 물벼락을 맞아도 즐겁기만 하다. 천방지축 빗속을 활보하며 동심으로 돌아간다. 소심함도 사라지고 장난기까지 발동해 우중 활력소라 아니 할 수 없다.

구름이 컴컴해지더니 급기야 눈물까지 쏟아낸다. 하늘에도 큰 슬픔이 있나보다. 아예 긴 장마란다. 여기저기에다 한바탕 뿌리고 나면 다시 평정을 찾으려나.
밀쳐두었던 검정장화가 웃는다. 아니 먼저 설쳐댄다. 포장되지 않은 데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첨벙거려 보는 거다. 엄마의 불호령에도 못들은 척 빗속으로 도망치던 어린 날로 달려보는 거야. 멋쟁이는 아니어도 자유인은 될 것이다.

약력
*수필가
*수필과 비평 신인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신곡문학상 본상 수상
*수필집 《바람이어라》,《찌륵소》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거제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정기 후원은 새거제신문의 신속 정확한 뉴스 및 정보 제공에 큰 힘이 됩니다!

후원하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