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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윤정희

가을이다. 햇살은 한층 엷어지고 살랑거리는 바람은 옷자락을 부드럽게 스친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다. 그렇게 뜨겁고 후텁지근하던 여름이 있었기에, 이 가을이 상큼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성급한 가을이 팔월도 가기 전에 정원에 와서 서성인다. 그 모습은 코스모스의 가녀린 줄기를 타고 내 앞에 나타난다. 혼자서는 가냘파서 바람을 이겨내기 어려웠는지, 무리지어 누웠다가 일어서는 코스모스. 그러나 전혀 꺾임 없이 바람을 탄다. 아니 바람이 코스모스의 정수리를 타고 저만큼 멀어졌다가는 다가온다.

나는 코스모스를 좋아한다. 가을이 되면 예저기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흔하다고 멀리 할지 모르나, 그래도 가을 하면 코스모스가 있어야 제격이다. 별로 탐하거나 가까이 두려 하지 않아도 가을과 가장 어울리는 꽃은 코스모스다.

나는 유독 코스모스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내 나름 사연이 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포로들은 내 고향 거제에 수용되는 처지가 되었다. 한적하던 섬이 느닷없는 포로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십만이 넘는 포로가 수용되어 그 안에서 이데올로기 싸움까지 벌렸으니, 내 고향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들이 있다가 떠난 수용소 자리에 갔을 때, 나는 처음 그곳에서 코스모스를 보았다.

그곳에 가는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 공포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곳을 간 것은 언제나 날 보호해 주던 오빠의 든든함과 여러 명의 친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때 맨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코스모스였다. 포로들이 머물러 있다 떠난 천막 사이로 코스모스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느닷없이 몰아친 회오리 속에 갇혀 있던 반공포로처럼 무리지어 서 있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포로들의 배식 대열처럼 코스모스도 그렇게 늘어서 있었다. 저 꽃은 어디에서 옮겨왔는지 모른다. 낯선 곳에 끌려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꽃. 온 들판을 메운 수용소 천막 사이에서 코스모스는 포로들 대신 서 있었다. 이국적 분위기였다. 겨우 힘들게 뿌리내린 코스모스를 우리는 마냥 좋아했고, 그 속을 뛰어다니며 놀기까지 하였다.

코스모스는 포로들이 떠난 후에도 줄을 서서 배식이나 기다리듯 서 있었다. 한 계절 예쁜 꽃을 피워 올리다가 찬바람의 기운이 엄습하면 까만 씨앗을 키우는 코스모스. 잘 익은 까만 씨앗은 늦가을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봄이 오면 새 삶터에 뿌리를 내리는 코스모스.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예고 없이 풀려난 포로들은 바람 따라 흩어진 씨앗처럼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매년 구월이 되면 가을 풍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올해는 북천골이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완행열차의 차창 밖으로 가을 풍경이 밀려간다. 그 맛을 즐기려고 떠나는 여행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들떠 있다. 하지만 포로들처럼 서 있는 코스모스가 눈앞에 나타나면, 나는 수용소 안에서 터질 듯이 쏟아져 나온 공포에 다시 떨게 된다. 그 때만은 역사 속으로 나를 끌고 가는 그 어떤 힘을 이겨낼 수가 없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는 공포에 질려 있다. 바람결에 울부짖는 천막의 통곡 소리에 그만 귀를 틀어막고 만다.

깊은 밤 갑자기 수용소 안에서 하늘로 불꽃이 터지면, 그 안에서는 바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불꽃은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들 간의 난동을 알리는 신호였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난투극을 철조망 밖의 주민들은 들어들어 알고 있었다. 불꽃이 터진 날은 공포 속에서 온 밤을 새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그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줄을 맞추어 군가를 부르며 훈련을 했다.

수용소로 인해 소개疏開 당했다가 삼 년 만에 돌아오니, 포로들은 모두 떠나고 여기저기에서 코스모스만이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우리를 맞았다. 물결처럼 일렁이며 바람을 타는 모습이 아름답고 평화스럽기까지 했다. 또한 안착한 코스모스가 대견스러웠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꽃씨처럼 방방곡곡으로 떠난 반공포로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자유를 갈망하여 부모 형제와 고향을 버리고 타국 같은 땅에서 뿌리를 내렸을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한국 전쟁 이후 곳곳에 퍼져 있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코스모스만큼이나 그들도 진정한 자유를 찾아 평화의 터전을 만들기에 힘들었을 것이다. 무리지어 나름의 삶을 꾸리는 코스모스처럼 그들도 이제는 이 땅의 주인이 되어 건강한 삶을 이어가길 소망해 보는 마음이다.

지독한 전쟁의 상혼이 지난 지도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몇 사람의 욕망 탓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죽임도 당했고, 고통 속에서 살다 생을 마친 사람도 있다. 또 살아 있어도 그때 받은 상처 때문에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가서 있을까. 우리는 그들의 소재도 알지 못한다. 한 평생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그들의 안부가 이 저녁나절에 내 마음 깊숙이 고개를 들고 파고든다. 오늘 따라 코스모스가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다.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저만치 가고 있다. 길가에 늦게 핀 코스모스 몇 송이가 한들거린다. 지난밤 비바람에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무언지도 모를 쓸쓸함이 밀려든다. 머잖아 까맣게 영근 코스모스 씨앗이 새 삶터를 향해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번에는 기름진 땅이 그들에게 제공되기를 바래본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이 탓인지 마음은 무디어지고 모든 것이 옛날 같질 않다. 그래도 가을이 오면 코스모스를 향한 아련한 기억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남을 어찌하랴.

약력
*거제 출생, 수필가
*거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료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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