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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多樣性)에 대하여하담스님 /무이사 주지

연말이라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서글픈 뉴스를 보았다. 또래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중학생이 자살을 하였는데, 자살한 중학생에게 가해를 했던 학생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장난으로 그랬다’라고 진술을 했다는 것이다. 뉴스를 본 국민들이 그 사건의 진위를 떠나서 충격적인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 가해 학생의 범죄행위와 자신의 범죄를 은폐조작하려고 하는 뻔뻔한 태도에 대한 분노도 있었겠지만,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또다시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사회적 불안감 때문에 오는 분노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두어 달 전에는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우리 국민들이 한국사회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는가?’라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국민의 약 70%가 ‘불만스럽다.’ ‘화가 난다.’ ‘분노가 일어난다.’라고 응답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자유경쟁시대를 주창하면서 주류와 비주류가 생겨나고,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확실하게 구분되어지는 양극화를 이루면서 집단간에 전쟁과 같은 대결구도를 갖게 만든다. 건전한 경쟁을 통해서 서로간의 발전을 유도하는 것이 사회적 도리이나, 현대인들은 비뚤어진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 자비도 없고 원칙도 없는 자신만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기득권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여 상대방에게 실패를 유도하거나 강요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모든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늘 긴장하게 되거나 불안하게 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거나 협조를 해줄 수 있다면,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사회제도나 환경에 대하여서도 불만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 실패를 거울 삼아 더 큰 성공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각설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성은 단면성(斷面性)이기보다는 양면성(兩面性) 내지는 다양성(多樣性)으로 갖추어져 있다. 모든 존재물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에너지 구성의 기본단위를 세포라고 말한다. 세포에는 양이온과 음이온, 그리고 중성자 등이 이뤄져 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은 양의 성질을 갖고 있다거나, 음의 성질을 갖고 있다고 표현을 하지만 또 다른 성질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과학적인 기준으로 봤을때는, 그 물질이 갖고 있는 개체의 속성을 한 가지로 표현하여 단면성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물질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속성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다양성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물리과학에서는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 운동하려고 하고, 정지된 물체는 계속 정지하려고 하는 물질의 속성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작용에는 같은 크기의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하는 것을 ‘작용 반작용 법칙’이라고 한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 반작용 법칙에서 보면, 모든 물질의 속성이 운동과 정치 혹은 작용과 반작용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물질의 속성에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안주하면서 살고 싶어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는데, 이것도 머물고 싶은 마음과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식세계도 안정과 변화를 갈망하는 생각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역사도 정 반 합(正反合)으로 이루어진다. 정(正)한 세력과 반(反)한 세력이 또는 화합(和合)하는 세력들이 서로서로 맞물려서 역할을 하거나 작용을 하면서 역사를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점에서는 어느 세력이 주류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비주류도 그 시대의 역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도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공존하게 되어 있다. 내가 서 있는 반대편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다고 해서 그 대상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공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환경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삶의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훨씬 아름답고 훌륭해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각 개인에게 그 사회의 평화로운 질서를 위하여, 사회적으로 기준이 되는 일면(법, 도덕, 윤리 등)을 강조하거나 요구하기도 한다. 강력하게 요구되는 사회적인 규제나 규범들 때문에 각 개인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속성에 대해서는 갈등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그 혼란을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편견을 갖게 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면서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영혼의 자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가끔은 일탈을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다양성에 대해서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일탈이라는 것이 현실의 상황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일상생활을 벗어나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상황들을 변화된 시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일탈을 통해서 삶의 문제와 영혼의 문제를 단편적이고 한정된 시각에서 보는 습관에서 보다 전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추는 것이다. 때로는 연습적인 경험으로 용기와 합리적인 자유를 느끼면서 영혼이 아름다운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스님들의 만행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심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평상심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의상조사께서는 법성게(法性偈)를 통하여 ‘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있어,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다. 라고 가르침을 주셨다. 이 뜻을 알기에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신이 알아채는 깨달음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나와 나 이외의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하나라면, 그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데 어찌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할 수가 있겠는가?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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