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창가에서 조로인생(朝露人生)의 표본을 보고 있다. ‘권력도 죽고, 인생도 가는’데 산사람들은 그 무엇이 무서워 사자(死者)의 헤게모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얄궂은 심사로 뉴스를 지켜보다 말고 문득 한 부분에 흥미가 댕겼다. 양념처럼 등장하는 ‘김의 여자’들, 그 위에 문득 배우 ‘신성일의 여자’가 겹치는 것이다.

이들 익사이팅한 의식세계와 이데올로기는 일단 동물 생태학으로 설명되어야져야 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의 9할이 오직 성적동기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에 담기에 부담스러운 전자 건은 차치하고, 후자의 경우를 보자. 그는 늘그막에 옛날 외도 대상의 나신(사진)을 전 국민들에게 선보이면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고 자랑을 한다. 이 이상한 자아를 감히, ‘어린왕자(생텍쥐페리)’의 버전으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무릇 사랑이란 ‘고유명사’라고 우기면 항변 할 현대인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맞닥뜨린 ‘사랑’ 앞에서 그 감정이 유일하기를 소망한다. 남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룰 경우 부부 공히 ‘유일한 가정’(1+1=1)으로 거듭나기 위해 서로에게 ‘길들여져야’할 책임이 있다. 오늘도 한 쌍의 신혼부부는 주례 앞에서 ‘관심과 이해’로서 살아가겠노라 약조를 했다. 신세대답게 대답이 하도 우렁차 하객들은 희소와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들에게 ‘어린왕자’ 한권을 선물하며 한 페이지에 장미꽃 책꽂이를 꽂아 두었다.

책꽂이가 꽃인 부분은 왕자가 넓은 장미밭을 지나다 우는 대목이 펼쳐지는 곳이다. 왕자가 살던 혹성 B612에도 장미 한 그루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 살 때 그 장미가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인 줄 알았다. 오직 그를 위해 헌신하고 사랑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막아주고, 햇볕이 내려쬐면 고깔을 씌어주고, 물을 조금만 늦게 주어도 목말라 죽겠다는 엄살을 기꺼이 받아 주었다. 장미가 죽으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최선을 다했다. 지구에 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는 많은 장미가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온갖 수모와 타박을 참고 견뎠구나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우의 등장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너에게 그 꽃이 소중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길들여진 탓이라고 했다. 상대를 길들이게 되면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고 된다는 논리였다. 어린 왕자는 비로소 “내게는 그 한 송이가 너희들(오천송이) 보다 소중해. 내가 그 꽃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야. 내가 유리 덮개를 씌어주고 바람막이로 보호해” 주었기에 그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함께한 세월 속에서 시나브로 든 미운정 고운정에 대한 책임감이다.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관심은 ‘너’가 ‘나’에게 유일하다는 뜻이며 그것은 종족적, 또는 유파적 개념으로의 존재라가 아니라 오직 자신하고만 고유한 관계가 설정돼 있음을 의미한다.
‘유일한 가정’은 둘이 힘을 합칠 때 가능해진다. ‘엄앵란’은 혼자 화분(남편)에 물을 주고 고깔을 씌어주고 바람을 막아주며, 일생 남편 역할을 감내했다고 한다. 동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모습은 행복이 아니다. 동시대를 걸었던 윤정희를 보자. 남편과 손잡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은 한 편의 시(詩)처럼 근사했다. 그 행복은 아내를 대접해 주는 남편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기실 백건우의 외모는 그의 피아노 실력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가진 마음의 눈은 진짜 미남이 어떤 사람인 지를 안다.

어린 왕자는 상대에게 길들여지는 법을 여우에게 물을 때 참을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오해의 근원인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신’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김영애는 내 일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이다. 몰래 유럽 여행까지 했다. 내 아이를 낙태까지 했다.” 굳이 묻지도 않는 엄청난 비밀을 누설하면서 “지금도 애인이 있다. 나같이 튼튼하고 잘생긴 사람이 연애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나”고 한다. 평생 한 이성만 보고 살기는 쉽지 않다고들 남성번식본능은 말하지만,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보통 남자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는 생텍쥐의 진리에 공감들하며 산다.

‘신’은 국회의원 재직 시에 뇌물수수건으로 구속, 출감 인터뷰에서 “감옥에서도 꾸준히 운동했고 50대의 체력을 자신한다”고 했다. 그 체력을 불우이웃 돕기에 썼으면 황혼 길이 보다 아름다웠을 텐데, 대뜸 자서전을 들고 나와서는 “요즘 정치판이나 세상 돌아가는 게 굉장히 살벌한데,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배려나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너스레를 뜬다. 정치가 유연성을 보이려면 정치가들이 불륜을 경험해야 한단 말인가? 이유의 알레고리마저 맞지 않는 괴변이다.

일견 장부의 일생은 여자와 달라야 할 것이다. 이태석 신부의 휴머니즘만큼은 아니더라도, 남성은 법적으로 공인된 ‘유일한 장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인생은 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데, 세밑에 서고보니, 보다 값진 남자들의 일생을 기대하고 싶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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