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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정법 바른 인연도안스님 /연등사 주지

불교를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이라고 하지요. 바른 믿음을 전제로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르게 실천할 때 결과물로써 분명 증득하는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를 한답시고, 앉아 있음에 익숙해져 있고, 삼재, 사주, 철학, 조류방생, 성지순례, 온갖 등(인등, 108등, 합격의 등, 사업성취의 등)을 고유가 시대에 밤새 밝혀놓고, 입으로, 말로써 부르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 중에서도 일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금은 불보살님전에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방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선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즉 行(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실천하지 않으니 증(證)에 해당하는 결과물로써 경전과, 천수경,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등에 나오는 신통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왜 앉아만 있고, 말로써는 이제 충분한데 결과물인 신통은 어찌해서 보여주지 못할까요. 경전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있고, 현재 티벳승려들은 또 그런 능력으로 실천하는데, 기껏 우리가 한다는 것은 가벼운 신병 정도를 치유키 위해 구병시식, 천도재 말고 무엇이 있습니까? 구병시식, 천도재를 지내보니 말끔히 해결되었나요? 적어도 증득한 바 힘이 있다면, 초기 암환자 말고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한 말기암환자, 시한부, 희귀병 등을 짧은 시간내에 민간요법, 식이요법 등이 아닌 ‘정법기도’로써 해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부처님 정법대로 실천할 때 그 힘은 생길 것이고, 이 신통이야말로 말법시대에 중생의 고통 중에서도 제일 큰 고통인 병마를 덜어주는 그 힘(신통: 기도법력)이야말로 불보살의 위대한 힘이라는 것을 일깨워서 바른 삶의 길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됐던 ‘故이 태석 신부님’을 보았을 겁니다. 그는 우리 모두를 감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감동과 감응의 배경은 육적(여섯 도적)을 가시밭길과 불구덩이에 머무는 바 없이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직자로서 실천적인 삶 아니겠습니까? 비록 종교는 달라도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믿음도 가르침도 꼭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나 가르침은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실천하는 그 선봉에 성직자가 당연히 실천 수행하는 모습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한답시고 어려운 문자나 난해한 용어를 쓰는 것이 불교인 양 비쳐지고 있는데, 부처님의 말씀은 아주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임을 불교를 공부해 본 사람은 다 아실겁니다. 지금 우리 절집은 세계 최대 부처님 조성에 경쟁적으로 혈안이 되어 있고, 자연을 훼손해 가면서 절집을 키우고 납골당을 짓고, 부처님 몸속 법당이니, 00신통도량이니, 00영험도량이니 등등… 법당 안을 들여다보면 큰 등은 무엇이며, 작은 등은 무엇인지, 법당이라 함은 ‘법이 있는 집’이란 뜻인데, 법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는 것인지.인등을 비롯해 각종 등을 켜는 비용과 산으로 바다로 방생을 한답시고 쓰이는 비용과 성지순례한다고 국내외로 부처님을 찾아 여기저기 쫓아다니지 말고, 그러한 막대한 비용으로 지금 우리 주위에 수술비가 없어 병고로 사경을 헤매는 이들을 찾아 ‘인간방생’을 하심이 어떨는지…

그 베품에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 사찰 이름이나 얼굴을 알리는 일이 없어야 하며,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직자가 실천하는 모습으로 중생을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불보살님의 권능을 갖기 위해 실천적인 수행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부터 도덕, 바른생활을, 또 국민윤리를 공부한 기억이 다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와 다른 바가 있던가요? 다만 실천하지 않기에 어려웠을 뿐입니다. 그럼 왜 말로는 실천을 얘기하면서 실천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불합시다.’ 다들 성불하셨습니까. 성불하고자 하는 이유가 다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목표는 성불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웃을 이익되게,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 바로 ‘중생제도’입니다. 성불은 중생의 이익을 위한 필요한 과정일 뿐이지 결코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지 못하는 그것은 방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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