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마지막 '약업사' 배길수(76·사진) 옹

동부면 학동. 한철 여름 장사를 끝낸 진주해변은 고즈넉한 가을바다로 빛깔이 변해 있었다.

한적한 횟집거리에 숨은 약방하나. 거제도 마지막 약업사 배길수(76·사진) 옹의 ‘금강약방’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영락없이 70년대 그 시절이다. 나무로 된 카운터는 색이 바래고 니스칠은 벗겨진지 오래지만 반질반질한 것이 매일 닦았나보다. 오른편에는 온갖 수석과 분재가 진열돼 있고 왼편에는 몇 안 되는 의약품들이 유리찬장에 놓여있었다. 찬장은 낡았어도 내용물은 새것들이다. 벽에 나란히 걸린 약업사 자격증과 허가증을 살펴보니 배길수 옹은 67년 시험에 합격해 68년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 40년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약국과 약방이 다르고 약사와 약업사가 다르다. 약사는 의사의 처방에 약을 제조· 판매하는 전문인이지만 약업사는 판매만 하는 준 전문인이다.

약업사제도는 1953년 약사법 개정시 무의무약(無醫無藥)지역 해소책의 일환으로 시행됐지만 1971년 폐지돼 약업사는 더 이상 배출되지 않는다.

거제지역엔 동부, 남부, 둔덕, 하청이 의약분업예외지역으로 지정돼 있는데 현재 약업사가 운영하는 약방은 이곳 금강약방만 남아있다.

배길수 옹은 “약업사가 사라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병원, 의원은 시내에 몰려있고 약국은 병원에 몰려있다. 병원, 약국 없는 농어촌에 약을 구할 수 곳은 보건소와 약방뿐인데 보건소는 근무시간과 약품종류에 한계가 있고 약방은 사라지고 있다”며 “몇 해 전만 해도 거제도에 3~4명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움직일 수가 없거나 세상을 떠나 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숨지었다.

약업사 제도를 부활시키자는 방안은 예전부터 추진돼왔다. 직계비속 또는 배우자에게 승계자시험을 치르게 해 약업사로 배출하자는 내용이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40~50년을 오로지 약업사로 살아온 이들은 결국 약방을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못하고 건강상 이유로, 또는 세상을 떠나 약방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배길수 옹은 사라져가는 약방을 아쉬워하며 전성기 때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60~70년 회충이 극성을 부리던 때, 담석증 걸린 아이가 약방을 찾았다.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라 크게 낙심한 가족들은 아쉬운 대로 회충약을 사 먹였다. 그랬더니 아이가 주먹만 한 회충덩어리 두 개를 토해냈다고 한다. 일반인의 그것은 풀어져 있는 반면 아이 몸에서 나온 덩어리는 아주 단단히 뭉쳐있었다. 그 후 아이는 금세 병이 나았다고 한다. 배길수 옹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흥분된 표정과 손짓으로 회충덩어리를 묘사했다. 버스도 다니지 않던 그 시절, 산간오지의 약방은 마을주민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음을 상기시키는 일화다.

지금은 멀미약, 감기약, 소화제 등 비상약이 많이 팔린다. 약방을 찾는 손님 대부분이 외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기 때문이다. 평일엔 손님이 거의 없다가도 주말엔 수입이 꽤 된다고.

배길수 옹은 글도 쓰고 수석도 모으며 분재도 가꾼다. 그는 거제문협 소속이며 벌써 14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다. 약방내부를 장식한 그림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비가 오면 손님이 없어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럴 때 빗소리를 들으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사람은 계속 움직여야 된다. 약방도 문 열 힘이 없을 때까지 닫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배길수 옹.

인터뷰를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서자 머리위로 녹슨 셔터 문이 눈에 띈다.
“선생님, 셔터 닫은 지는 오래됐습니까?”
“셔터는 태풍 올 때만 닫지 평소에는 안 닫는다. 아픈 사람이 닫힌 셔터문을 보고 발길을 돌리면 안되기 때문이지”

조행성 기자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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