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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순/ 길 위에서 저자 | ||
이 길은 내게 있어서 이미 익숙한 길이다. 혼자 걸어도 같이 걷는 길에 나뭇잎을 건드리는 한 점의 바람과 새소리에 귀를 열고 새로운 나와 만난다. 삶의 허기로 유린당할 때 숲은 정신 함양에 백신의 효과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안락하다. 누군가와 체온을 맞대야만 되는 인간과는 달리 나무는 홀로 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는다. 반송 재를 지키는 동백과 벗 나무가 부지런히 잎을 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에 잘 뜨지 않을 만큼 여리지만 껍질을 뚫고 잎을 달며 제 키를 키운다.
하동에는 십 리 벚꽃 길이 있다. 그 길이 옛 적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누군가의 푸른 생각이 세월과 함께 온 것이다. 건물은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거대한 몸집을 키우지만 나무는 시간이다. 맨 위에 돋은 잎이 나무의 성장을 이끌듯이 앞선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미래를 이끈다. 하동 벚꽃 길이 십 리 터널이라면 반송 재에서 와현까지는 십 오리 길이다. 무관심으로 버려진 이곳에 누군가가 힘든 줄 모르고 나무를 심었다는 건 대단한 첫 걸음이다.
머잖아 나뭇가지와 가지사이가 만들어 낸 터널에 벗 꽃잎이 눈처럼 날리면 반송 재는 연분홍 꽃빛으로 물들 테고 여름이면 그늘이 내릴 것이다. 낙엽 지는 가을이나 겨울이면 더 좋겠다.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과 가랑잎을 밟고 달빛도 밟으며 젊은 날을 자장가처럼 회상하며 보폭을 맞출 수 있다. 차량을 통제 시켜 아이들의 소풍지로서 잃어가는 정서를 지켜줄 장소로도 그만이다. 그때쯤이면 동백과 벗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테마 길이 되어 웰빙 바람과 맞게 많은 사람들의 각광을 받을 일운의 명소로 확신한다.
숲은 누군가의 나무 심기로부터 시작된다. 땀 흘리는 일이 귀찮아서 아무도 나무를 심지 않는다면 그늘은 어디에서 찾을까. 심는 사람과 그늘만 찾는 안일함은 언제나 엇박자다. 문명에 길들여진 이기적 중독성에 제어 당하기 때문이다. 세상 잣대에 생각이 멈춘 유연성의 균형이다. 당당함을 유지하며 열린 가슴이고 싶지만 짧은 하루 동안 사랑과 미움의 우거진 숲을 수없이 넘나든다. 자연이라고 해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 끝없이 내어 주는 화수분은 아니다. 미래를 위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당위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허황된 이론에 불과할 수 있다. 누군가는 당장의 생존이 더 중요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넓혀 놓은 마음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앞선 사람의 실천으로 이 명소를 걸을 사람들 속에 나도 소속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문명을 누리는 대가로 톡톡하게 지불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거리감이다. 위 아래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흩어져 살던 옛날보다 더 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사람 숲 속에서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외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관계는 맞춤형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가난한 의미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소속되지 못한 것이다. 어떤 학교나 어떤 직장에 소속되었느냐에 따라 사는 동네가 달라지고 어떤 사람과 어떤 감정으로 만나느냐에 삶이 결정된다.
빛바랜 낮달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다. 바위틈 사이로 마른 풀을 가르는 이상한 움직임을 느낀다. 월동 준비로 뱀이 개구리를 물고 간다. 약자와 강자 간의 내재된 상흔인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 시키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생존법칙이다. 모든 폭력은 저항 없음이 보장된 상대에게 더 자행된다. 잎을 하나씩 내려놓는 반송 재의 동백과 벗 나무를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할 시간이다. 곧 닥칠 겨울의 찬 서리와 혹독함을 잘 견뎠다가 봄이 되면 무성한 잎을 부지런히 피워서 아름드리로 어서 자라길 기대한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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