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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전하는 말

▲이정순/길 위에서 저자
8월도 끝자락이다. 계절은 여름만 기억 하려는지 더위를 내려놓을 기세가 안 보인다. 홍수와 폭염으로 가족을 잃거나 전 재산을 허무하게 날리는 뉴스 속의 세상은 한없이 어둡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된 삶이기에 스스로를 잘못 다스리면 자기 하나조차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다.

한참이나 덜 찬 종량제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칠월 초아흐레의 어스름한 달빛을 어깨에 받으며 화단가에 막 앉을 참이었다. 동백나무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활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다. 누군가가 기르다가 버려서 도둑고양이로 전락한 것일 게다. 음식물 수거 통 주변에서 먹이 냄새를 맡고 뱅뱅 돌았을법한데 견고하게 만들어진 통이 고양이의 허기를 허락했을 리 만무하다.


내 인기척에 몸을 더 움츠린 녀석에게 ‘괜찮아. 괜찮아. 겁먹지 마’라고 고양이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한다. 허기져 있을 녀석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배를 채워줄 만큼 동물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을 지니지 못한 게 나다. 그러나 나를 경계하는 그 녀석의 심리에 위협은 주지 말아야겠기에 내 머물렀던 자리라도 양보하고 볼 일이다.

뻐근한 어깨를 펴며 하늘을 보는지 나를 보는지 착각에 빠질 무렵이다. 앞치마 호주머니에서 전화기의 수신음 소리가 유난스럽다. 다소 언성이 높은 남편의 목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커피 물을 불에 얹어 놓고는 깜빡 잊고 바깥에서 가만히 있는 고양이 타령이었던 것이다.


누구든 발견 했으면 됐고 화재가 안 일어났으면 다행이지 소리는 왜 지러나. 이게 요즘 내 나태한 정신 상태의 한 단면이다. 이미 주전자는 못 쓰게 된 듯하고 남편이 수습은 해 놓은 것 같고 이래저래 더 어슬렁거린다. 내 못난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보이는 것만 보며 살고 싶은 요즘이다. 나 자신이 모르는 내 성격 속에서도 고치고 다듬으며 수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견딜 만하면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내 안의 그 무엇과 타협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어떤 대립이 생기면 가장 양보하기 싫은 대상이 남편인 것은 내 잘못된 아집이다. 부부란 기차의 레일 위를 나란히 함께 달리면서도 맞닿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는 선로 같은 사이다. 서로를 염두에 두고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더러 맞지 않아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불협화음 같은 것이다. 비릿함을 어머니 품속인양 모체로부터의 본능을 못 잊는 나에 비해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해서는 사실조차도 깡그리 덮어버리는 것이 남편이다. 창 너머로부터 스멀스멀 밀려오는 그리움이 간절한 나와 별로 흥미롭지도 않은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재미있어 껄껄 웃는 남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자기 방을 하나쯤 갖고 있기 마련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방을 가진 나는 자연스레 책과 친하다. 내면에서 용트림하는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난 후에는 막상 절망한다. 살아가는 잡다한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내 보내졌을 때 푸념밖에 되지 않을 때 느끼는 수치다. 글에 어떤 의미를 부여 시켰든 사물을 어떻게 간파했든 그 글에는 나를 닮은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고요를 맞으려 열어 놓은 가슴은 간데없고 격식과 꾸밈이 허세로 둘둘 말아 놓은 것 같다. 그러다가도 늪처럼 편안한 언어적 표현의 자유를 잊지 못해 또 자판기를 두드린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게 아닌 데카르트가 간구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벅차다.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고 떠벌리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아 사랑할 대상이다.

제 새끼 하나 못 기르는 식물이나 제 새끼 하나는 기르는 동물보다 제 새끼도 남의 새끼도 다 길러내는 인간은 분명 무적(無敵)의 용사(勇士)다. 그러나 당하지 않을 사람에게서 당했을 때 드러내놓고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을 때는 그만큼 절망이 크다. 이럴 때는 자칫 자괴감에 빠질 수 있으니 차라리 자신에게라도 과시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사실로 울다가 우는 도중에 숱한 이유들이 끼어들어 슬픔을 더 부채질 당할게 아니라 세월이 무쇠를 녹여 주길 기다리며 허한 가슴을 다스릴 일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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