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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이정순
/'길 위에서'저자
“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 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 게 나한티는 새 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 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제. 눈도 못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 손가락을 펼쳐보고 발가락도 맨져 보면 힘이 나곤 했어. 착 달라붙은 작은 고추에서 오줌 줄기가 나오고 아장 걸음에 어찌나 웃음이 터지는지 금은보화를 내 앞에 쏟아놔도 그같이 좋진 않았을 게다. 학교 보낼 때는 또 어땠게? 이름표를 손수건이랑 함께 니 가슴에 달아주는데 왜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는지. 니 종아리 굵어지는 거 보는 재미를 어디다 비교 하겄니 봐라 너 아니믄 이 서울에 내가 언제 와 보겄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중에서-

‘엄마를 부탁해’라는 책을 읽으며 부모와 자식의 연대 관계와 맹목적이면서 본능적 양육전략의 삶을 조명해 본다. 첫아들의 졸업증명서를 직접 든 엄마가 기차를 타고 낯선 서울에 있는 아들의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들려주는 엄마의 이야기를 부분 발취했다. 책을 사 놓고 2년이 지나도록 잊고 있었는데 친구가 갖고 싶다며 양해를 구한다. 사람 심리가 웃긴다. 먹지 않던 먹이를 치우기 위해서 가져가면 먹으려는 강아지처럼 무관심 했던 그 책이 새삼 와 닿는다. 책이란 빌려간 사람으로부터 읽는 시일을 기다려 줘야 하고 그러다 보면 망각하기 쉽다. 책 도둑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내 것으로 있을 때 읽고 줘야겠기에 내킨 김에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운다.

소설 제목같이 부탁할 엄마가 내게는 없다. 자기 존재를 덮어둔 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마르고 닳으며 살다가 이미 오래 전에 속절없이 떠났다. 세상에 머문 73년의 생이 당신을 위한 날은 없었다. 희생이 당연한 듯 스스로가 포기한 엄마의 삶이 떠올라 가슴에 쏴한 바람이 스친다. 틀니 오물거리며 고쟁이 깊숙이 찔러 뒀던 쌈짓돈을 꺼내 주시던 외할머니나 초경(初經)이 시작될 무렵에 결혼을 해서 시대적 물살처럼 가난을 비켜 가지 못한 게 엄마의 삶이다. 희생과 헌신만 하고 살다간 엄마라는 이름이 하필이면 낡은 코고무신과 맞물려 목젖이 아릿하다.

꽃이 피고 지는 이치처럼 삶은 반복의 바퀴를 단 수레다. 복종과 희생만이 미덕인 줄 알고 산 엄마의 삶이 싫었던 어릴 적의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밤마다 일기장을 채웠다. 흐르는 시간 따라 엄마가 떠난 지 매 1년씩 해마다 포개져서 15년이 쌓였다. 자식이 남 앞에 버젓하지 못하면 엄마라는 이름은 고독해 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결혼이라는 제도권으로 엄마를 의식적으로 밀어 내고 산 오만과 공허감이 이제 와서 무거운 형벌로 남아 있다.

어미라면 누구에게나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 주는 우유 빛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 아이에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쏟지만 그게 일방적이라 하더라도 에너지를 전부 쏟는다. 그렇지만 노후를 익숙하게 대처할 만큼 준비된 것도 없는 게 이 땅의 엄마들이다. 잠재워 둔 의식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봇물처럼 터질 내 연민이 두려워 지난날의 기억은 여기까지만이고 싶다. 하늘도 낮과 밤을 넘나들며 하루 안에 두 번은 옷을 갈아입지 않는가.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눈 감고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겸손해 진다. 이 5월에 잊은 듯 살아온 엄마를 떠올리며 신경숙님 ‘엄마를 부탁해’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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