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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이정순
/자유기고가
우리시에서 테마가 있는 길을 발굴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환영할 일이다. 지금까지는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말 그대로 새벽종을 울렸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병마와 재해로부터 삶을 저당 잡혔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은 목적과 결과를 바로 내야 하기에 신속하고 편리한 게 우선이다. 지친 심신은 문명에서 조금 비켜 세워서 한 박자 늦추어 다스릴 일이다. 자동차가 땅의 주인이 되어버린 지금 느려서 얻지 못한 것보다 서두르다가 놓쳐버린 것도 많다.

거제도에는 곳곳에 산재된 아름다운 길이 많다. 서이말 등대 초입으로 들어서니 바람이 머무는 길이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지도상에도 없는 오솔길에 풀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동백 림이 우거져서 하늘이 한 뼘이고 길도 한 뼘이다.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비바람에 깎이고 쓸린 나무뿌리가 혈관처럼 드러나 있다. 호랑이가 턱을 걸치고 놀던 바위라 하여 ‘호랑이 턱 건 바위’라는 독특한 이름의 바위에 걸터앉는다. 일명 가마 바위답게 막힌 곳 한 점 없이 외도와 내도만이 숲의 내력을 기억한다. 해금강이 저 만치에서 해무(海霧)로 싸여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슴에 붉은 벽돌이 얹힌 날 찾아오면 조금은 덜어 내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숲길에서 계단식 밭을 만난다. 밀감나무를 재배했던 밭으로 오래 전 한파로 인하여 고사(枯死)된 흔적이다. 밀감나무는 처음부터 밀감이 아니고 탱자나무와 접붙이기를 한 것이다. 넝쿨 식물을 뒤집어쓴 밀감나무가 신기하게도 밑 둥에서 탱자나무로 자라고 있었다. 귀소본능이랄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서까지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하얀 꽃을 피웠으니 지조 있는 탱자나무다. 꽃이나 열매가 나무의 얼굴이라면 뿌리는 마음이다. 도심의 무수한 발길 반대편에서 부지런히 자양분을 받으며 잎과 열매를 맺는 뿌리는 속 깊은 사람의 마음과 같다.
시간이 멈춘 숲에서 푸석한 부엽토에 발등을 묻으며 하늘을 이고 걷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의 바다가 자식의 허물을 다 덮는 어미의 품처럼 넓고도 깊다. 암벽에 잘게 부서지며 신음하는 하얀 포말을 따라 걷다보면 천수금석(天水金石)계곡을 만난다. 이 계곡은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 바닷가의 황금빛 바위로 내려 앉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온다. 예전에는 칠월 칠석 날이 오면 예구마을과 구조라 마을사람들이 이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무병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수 백 미터 떨어진 공곶지의 젖줄로 이어지고 있다. 공곶지라는 지명은 빈 땅에 원수(왜구)들이 머물렀다하여 공구지(空仇地)라 불렀다니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과거다.

내킨 김에 안목 없는 아녀자의 짧은 소견이지만 오늘 걸은 길을 중심으로 테마 길을 만들어 본다. 선창마을 지세포성을 출발거점으로 정한다. 바다를 낀 성을 돌아 연지봉에 있는 지세포 봉수대에 올라 횃불로 왜구들의 침입을 알린 선조들의 지혜와 희생을 생각한다. 망산의 와현 봉수대로 가서 바다 표면을 비집고 솟아있는 소대병도를 보며 거대한 바다가 오직 푸른빛만 허락하는 의미를 배운다. 서이말 등대 초입으로 들어서서 풀 향기를 맡으며 오솔길을 걷는다. 야생화로 꽃무더기를 이룬 공곶지 언덕을 지나 타원형의 항구를 품은 예구마을을 거친다. 야트막한 와현 재 약수터의 물로 갈증을 풀며 도착거점으로 볼 때 트레킹 코스로서 손색없는 코스다.

아름다운 곳에 사는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가슴까지 저절로 채워지는 건 아니다. 사는 일이 물처럼 순조롭게 흐르지 않으니 스스로가 다스릴 일이다. 권태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생각의 잔재를 털어 내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길을 걷는다. 뭍으로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다 죽은 지어미의 동백꽃 전설을 이야기 하며 길 위에서 또 하나의 길을 찾는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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