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

물건을 묶을 고무줄이 필요해서 책상 서랍을 뒤진다. 예전에는 많이 사용했지만 요즘은 쓸 일이 없다보니 잘 눈에 안 띄어 한참을 찾는다. 서랍 구석에 고무줄 몇 개가 보인다. 그중에서 끊어진 고무줄을 꺼낸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비벼본다. 도르르 감기는 감촉이 좋다. 또 줄을 당겨본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줄은 이내 다시 돌아간다. 이 고무줄은 더 이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나마 탄성은 남아 있지만 물건을 묶는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마치 방울이가 생각했을 고무줄 같다.

열다섯 해 전, 지인이 잘 키워 달라는 부탁과 함께 한달 된 조그만 갈색푸들을 들고 왔다. 이름은 ‘방울’이라고 했다. 그 강아지를 보며 식구들, 특히 동생이 많이 좋아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개에 물린 기억이 있는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부모님께서는 남매의 정서 함양에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물방울’이라는 이름까지 지으시며 그를 ‘식구’라는 고무줄로 묶으셨다. 그렇게 우린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시작된 동거에 동의할 수 없었다. 녀석의 갈색 털은 온 집안에 날렸다. 또 집안 구석구석 녀석의 소변 흔적들은 더욱 불쾌감을 주었다. 그래서 방울이가 더더욱 싫었다. 이런 나의 생각도 모르는 녀석은 열린 방문을 머리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발을 간질이며 친해지려 애교를 부렸다. 그럴 때마다 매정하게 밖으로 내치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귀가를 할 때면 내가 아직 안 들어온 것을 아는지 현관 앞에 배를 깔고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매달리며 사람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이런 하얀 웃음을 날마다 보게 되니 거부하던 나의 마음도 서서히 열렸다.
어렵게 친해진 방울이. 쉬는 날이면 방울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녔다. 산책이라야 동네 한 바퀴를 같이 도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녀석은 그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는 산책 도중 풀린 운동화 끈을 묶으려다 녀석의 목줄을 놓쳤다. 그러자 갑자기 무엇을 쫒는지 오던 길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잡으려 했지만 너무나 빠르게 뛰어가 붙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 앞에 왔을 때 방울이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안도감과 미움이 몰려왔다. 식구라는 고무줄이 그를 집으로 이끈 것이다.

그 후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방울이는 먼저 도착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산책이나 외출 중에 녀석을 잃어 버려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고무줄로 묶여 있는 식구이니까.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방울이는 밥 먹을 때도, 여행을 할 때도 늘 가족들과 같이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했다. 녀석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집안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혼자 둘 때는 외롭지 않게 텔레비전을 틀어줬다. 하지만 그는 식구가 같이 있길 원했다. 혼자 남겨질 때면 녀석에겐 ‘가족’이라는 고무줄이 덜 묶였다 생각이 들며 외로워져서 그런지 엄청 짖었다.

얼마 전 전주에서 행사가 있어 가족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하지만 방울이와 동행하기에는 곤란했다. 그렇다고 혼자 두면 이웃에게 피해가 될 듯싶어 고민 끝에 이웃집에 맡겼다.
행사가 끝나고 귀가하면서 그를 찾으러 갔다. 이웃주민이 한 참을 고민하다 미안하단 말과 함께 방울이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다. 이웃집에 맡겨진 후, 한참을 불안해하며 서성이다 문이 열리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고 했다. 이웃은 뒤쫓아 달려 나갔지만 방울이는 사력을 다해 잡히지 않으려 내달리다 차도로 뛰어 들었다고 한다.

이웃집에 맡겨진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평소에도 혼자 남겨질 때는 식구들과 고무줄이 덜 묶여 있는 것 같아 불안해했는데, 이번에는 고무줄의 한 귀퉁이까지 끊어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열다섯 해 동안 가족이라는 고무줄로 묶여 오순도순 살던 집을 그리워하면서. 늙어서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졌지만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리라.

느닷없이 그의 하얀 웃음이 되살아난다.
이웃집에 맡기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또 가족 한 명이라도 남아 있을 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가족 없이 홀로 가는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질기고 탄성 좋은 고무줄로 바꿔 묶어야겠다. 다시는 덜 묶이고, 끊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그를 생각하며 손에 있는 끊긴 고무줄에 매듭을 묶는다.

약력
*수필가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계룡수필문학회 회원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저작권자 © 새거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