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목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 생명파 시인인 그의 숨결은 아직 거제에 남아 여전히 푸른 숨을 내쉰다. 둔덕면 방하리(507-5) 생가를 비롯해 기념관과 묘소 등이 청마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것.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시 또한 사람들에게 읽히고 낭송되면서 불멸의 생을 이어가고 있다. 푸름이 대지를 덮는 봄날, 청마의 시는 청량함을 더해주는 존재. 그의 발자취가 시작된 ‘둔덕골’은 양지 바른 산방산 푸른 송백(松柏)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며, 청보리는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는 아름다운 곳이다. 하늘이 유난히 맑았던 식목일 오후 둔덕천 둑길을 걸으며 때 묻지 않은 둔덕골의 자연과 청마를 떠올렸다.

둔덕골은 둔덕면 거림, 방하, 산방, 상둔, 시목리에 이르는 ‘문화누리’를 일컫는다. 청마의 시적 배경이 되기도 한 까닭에 ‘둔덕詩골’로도 불린다. 이 사이를 흐르는 맑은 실개천이 둔덕천인데 거제지역 5대 평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둔덕평야의 젖줄이다.

사곡삼거리에서 성내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파르게 굽은 언양고개를 넘으면 둔덕면으로 접어든다. 내리막 갈림길에서 우회전 한 뒤 분홍빛 꽃잎 흩날리는 벚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쭉 달린다. 둔덕의 전원에 취할 때쯤 여러 개의 깃발이 솟은 다리가 보이는데 청마가 태어난 방하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이제부턴 두 다리로 청마의 숨결을 느끼며 걸어야 한다. 다리 위아래를 흐르는 게 둔덕천. 빨간색을 입힌 산책로가 둑을 따라 그림같이 놓였다. 오른편엔 청보리밭이 초록 융단처럼 깔렸고, 왼편엔 맑은 둔덕천이 흐른다. 이곳만 놓고 보면 섬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 그저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풍경만 눈에 가득 담긴다.

바닥이 탄성 소재가 아니어서 걷는 첫 맛은 다소 까칠한(?) 편. 포근한 봄바람에 실려 오는 풋풋한 흙내음이 제법 상쾌하다. 멀리서 들리는 철지난 가요의 노랫가락이 기억마저 과거로 데리고 가는 듯 복고적 분위기도 난다. 바위에 둘러싸여 봄빛의 새 옷으로 갈아입는 산방산의 고운 자태는 눈맛을 더하는 멋들어진 배경.

짧은 거리를 걷고 나면 아치형의 작은 다리 ‘산방보도교’를 마주한다. 길이 25m에 폭 4m의 걷기전용 다리다. 2007년 6월 공사에 들어가 2008년 4월 마무리됐다. 양쪽 다리 끝 가운데 부분엔 돌기둥이 박혀있는데 자동차가 다닐 수 없도록 만든 장애물인 셈. 꼭 걸어서만 건너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방보도교를 지나면 졸졸 흐르던 둔덕천의 냇물소리가 다소 커지는데 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속도가 빨라져서다. 폭포수(?)마냥 시원스런 흐름이 몸 안의 티끌을 씻어 내리는 기분이다. 갑자기 물 위에서 한가로이 노닐던 새 십수마리가 한꺼번에 떼 지어 날아오른다. 이방인의 발걸음이 녀석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 울어대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조금 더 걷다보면 둑 옆으로 전봇대가 줄지어 나타나는데 이 구간부턴 단장된 산책로가 끝나고 콘크리트 포장으로 바뀐다. 주변의 호젓한 경치는 걷는 맛을 돋우지만 쿠션 없이 딱딱한 바닥은 여전히 성가시다. 오후 햇살이 바닥에 반사돼 눈이 부신 것도 흠. 쪽빛 하늘과 좌우를 둘러친 산봉우리,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히 흐르는 둔덕천이 만들어내는 투명한 수채화 같은 풍경이 위안거리다.

줄곧 평지가 이어지던 길이 아래로 처진다. 건너편 둑으로 넘어갈 수 있게 만든 콘크리트 길. 가운데 부분은 물길이 살짝 타고 넘어 뒤꿈치를 들고 한 발짝씩 조심스레 옮긴다. 자세히 보니 아래로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유속의 흐름을 돕는 구조로 되어 있다.


걸어왔던 반대편 둑으로 올라서면 바람결에 일렁이는 초록빛 물결과 마주한다. 겨우내 자란 보리 잎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길가엔 민들레가 꽃대를 틔웠고, 보랏빛 들꽃도 새침하게 돋았다. 어미염소를 따라 풀을 뜯는 아기염소의 모습까지 한데 어우러지며 봄날의 망중한(忙中閑)을 빚어낸다.

사실 둔덕천 둑길은 걷는 지루함을 달래줄 음악이 필요 없다. 시냇물 소리가 걷는 내도록 귓가를 따라 오기 때문. 진양조로 시작한 물길은 둑을 거슬러 오르며 자진모리로 빨라졌다가 다시 한 박자 쉬었다 가빠지길 반복하는 게 우리네 판소리와 닮았다.

한동안 걷으면 딱딱한 콘크리트길이 끝나고 융단처럼 풀이 깔린 흙길로 접어든다. 군데군데 ‘암초’(돌멩이)가 있지만 내딛는 감촉이 스펀지처럼 푹신해서 좋다. 둑을 따라 계속 걸으면 큼지막한 돌덩이를 쌓아 만든 작은 폭포(?)가 나온다. 낙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떨어지는 소리는 제법 우렁차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흐른 땀을 식힌다.


둑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원이 들어온다. 커다란 조경석으로 둘레를 친 8자 모양의 연못이 눈길을 잡는다. 가운데엔 징검다리가 놓였다. 팔각정과 벤치, 나무다리도 만들어져 있어 쉼터로는 제격. 한 편엔 주차공간도 마련돼 있다.

청마는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에서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라고 노래했다.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하고 어질게 살다 죽길 바랐던 청마는 1976년 부산 좌천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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