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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향 연가

이정순
/'길 위에서' 저자
바다 물빛이 시리도록 푸른 날이다. 바람이 간간이 물결을 일으키지만 거칠지 않아서 좋다. 마당 저 편의 모과나무가 겨울을 잘 견딘 대가로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여린 잎을 연다. 아마도 지진으로 얼룩진 지구상의 어둠은 잘 알지 못하나 보다. 나무와 바다만 바라볼 일이 아니라 모자를 눌러 쓰고 호미를 든다. 퇴비를 밭으로 옮기는데 힘이 모자라서 질질 끄니 포대 옆구리 여기저기가 툭 터진다. 시원찮은 농군의 하루가 빡 세게 시작 된다.

지인이 심어준 매실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고 있는 걸 봐서 적기를 잘 맞추었나 보다. 막 돋은 비파 잎은 고라니가 몽땅 따 먹어 버려서 자라는데 지장은 없을지 걱정이 되고 속도 상한다. 보리수나무도 심어준 사람의 마음을 닮아 파란 잎을 달며 튼실하게 성장을 시작한다. 삽으로 땅을 뒤엎어 보지만 마음대로 뒤엎어 지지 않는다. 중장비가 한 차례 갈아엎어 준 땅임에도 불구하고 옥토가 되려면 세월과 함께 많은 손길이 가야 할 일이다. 흙이라면 밟는 것조차 싫다는 남편을 반은 협박하고 반은 애 달래듯 해서 밭고랑을 만들었다. 잡초의 성장을 차단하기 위해 비닐을 씌우고 나니 제법 갖춘 밭의 형태에 보람을 느꼈다. 남은 퇴비를 단단히 묶고 꺾일 듯 아픈 허리를 펴며 시원한 냉수로 목을 축인다.

섬으로 들어온 지 29년이 되었으니 내가 태어난 고향보다 훨씬 더 오래 산 셈입니다. 고향을 자주 왕래하던 지난날에는 하루 종일 배 타고 버스 타는 것에 지쳐 이곳 섬이 확실한 유배의 땅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내 고향 경주로 갈 꿈을 꾸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크게 이룬 건 없지만 자연스레 생활의 안정은 세월과 함께 왔다. 이제는 이 섬을 떠나서 살 자신이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이곳 섬에 노후를 보낼 작은 쉼터 하나 짓는 꿈을 꾸는데 주저함이 없다.

바다가 눈앞에 있고 계절마다 다른 빛으로 몸을 바꾸며 피톤치드 뿜어내는 산이 뒤에 있었으면 좋겠다. 넓은 터를 마련할 자신은 없으니 좁은 터에서 갖고픈 공간을 만들자면 7층쯤 되는 키 높이가 좋겠지만 버거워서 5층으로 확 줄인다. 그 5층은 만만하냐는 자문에 놀라 또 자신이 없어서 4층으로 내렸지만 최소한 5층은 되어야 한다며 다시 올라가는 야무진 포부로 혼자 웃는다.

방 하나쯤은 여러 장르의 책을 빼곡하지 않게 꽂을 것이며 아담한 차실로 꾸며 내 좋은 사람을 기다린다. 차는 꼭 전통 차나 약초 차로 할 것이며 차물 받는 청음에 귀를 맑게 하고 후각으로 느끼는 차향과 혀끝으로 맛을 음미한다. 그리하여 찻잔의 온도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으로 우연과 필연을 땅에 묻은 씨앗처럼 가슴으로 품고 싶다. 풀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당 저 편에 배불뚝이 항아리 하나 놓고 걸터앉으면 모난 마음이 조금은 둥글게 다듬어질 것 같다.

산다는 건 가슴 속의 추억과 머릿속의 기억뿐이라 했던가. 함께 사랑하며 기뻐한 시간보다 떨어져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러나 꼭 사랑이라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일 수밖에 없는 삶이다. 머릿속에 있는 꿈 조각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최면을 걸듯 말을 한다. 가슴으로 쏟아 내는 말이 있어야 책임과 마음의 각오를 한 번 더 다지게 되고 그 말이 씨가 되어 싹을 틔운다고 믿는다. 멀지 않은 세월에 그 싹이 어서 자라서 모과향 연가를 낮은 소리로 부르고 싶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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