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을 앞둔 요즘 날씨가 부쩍 변덕을 부린다. 봄기운을 재촉하는 비라지만 이틀씩 쏟아지는 건 예사. 바람도 가세해 더러는 강풍이 휘몰아치기까지 한다. 얼마 전엔 눈 폭탄에 갇혔고, 꽃샘추위마저 ‘뿔’이 났는지 떠나는 막판 기세가 보통 아니다. 맑은 하늘 보는 게 손에 꼽을 정도인 춘삼월(春三月), 걷기 또한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걷기 좋은 길’을 찾는 여정을 게을리 할 수는 없을 터. 월요일(15일) 오전 내도록 퍼붓던 빗줄기가 오후 들어 그치기 무섭게 사곡고개를 넘었다.

낮게 깔린 회색빛 구름이 금방이라도 굵은 비를 뿌릴 듯 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불안감이 한가득 몰려오는 이유다. 다행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나와 우려가 현실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국도14호선을 타고 재를 넘은 뒤 내리막 코스로 접어들자 밋밋하지만 정겨운 맛이 느껴지는 사곡만이 눈에 담긴다.
그대로 쭉 달려 사곡삼거리 근처에 다다르면 샛길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두동으로 빠지는 지하통로 진입로에 앞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차머리를 돌린다. 속도를 줄여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엔 사곡삼거리에서 내리면 된다.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운 뒤 가구점 쪽으로 돌아 나오면 평소 국도에 가려 잘 눈에 띄지 않던 산책로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완만한 해안을 따라 평평하게 닦인 사곡 해안산책길이 오늘의 주인공. 바닷바람 맞으며 갈매기 떼를 벗 삼아 걷는 맛이 제법 상쾌하다.
산책로 오른편으로 노란 수선화를 빼닮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다. 바닥에는 나뭇결무늬의 석재 보도블록이 말끔히 깔려 걷기 전 첫인상이 썩 좋다. 눈길을 왼쪽으로 돌리면 경치를 해치지 않는 철재 난간이 이어지고, 그 너머엔 사곡만의 소박한 풍경이 담백한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곡 해안산책로를 둘러볼 차례. 주말 동안 쉬었던 터라 발걸음도 가볍다. 길옆에는 꽃밭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른바 ‘화신’(花神)의 손길이 부족한 듯 화려한 꽃망울은 아직 덜 여물었다. 달력은 이미 봄의 문턱을 넘었지만 꽃들에겐 이른 시기. 그래도 봄은 지척에서 우리를 맞는다. 화단 군데군데 초록빛 싹을 틔운 봄의 전령 쑥이 돋아나 삼월이 왔음을 알린다.

반면 귀를 괴롭히는 불청객도 있다. 국도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내는 소음이 제법 성가신 때문이다. 이것만 빼면 봄이 오는 사곡 해안가를 걷는 기분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주변 경치를 찬찬히 감상하며 걷기에 빠져들게 되면 이 정도 잡음쯤은 기억 한 편으로 금세 묻힌다. 느림의 미학 걷기가 가진 여러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 하다.

TV 화면에서 더러 봤음직한 장면도 눈앞에 펼쳐진다. 물 빠진 갯가에선 바지락을 캐는 아낙들의 손놀림이 바삐 움직이고, 사곡만 터줏대감 격인 갈매기들은 물 위를 한가로이 노닐며 오후의 나른함을 쫒는 모습. 간간이 녀석들이 내뱉는 울음소리조차 혼자 걷는 쓸쓸함을 달래주는 ‘노랫가락’처럼 바람에 실려와 귀에 닿는다.
한동안 경치를 즐기며 걷다가 길가에 마련된 쉼터에 앉았다. 잠시 주변을 훑어보니 성내공단과 멀리 빨간색의 아치형 다리 가조연륙교가 눈에 잡힌다. 수평선엔 해상크레인 두 대와 컨테이너선 한 척이 멈춰선 듯 떠 있다.

휴식도 잠깐 무뎌진 걸음에 힘을 싣는다. 사곡삼거리가 뒤로 멀어지고, 해수욕장이 가까워질 때쯤 앙증맞은 다리(?)를 만난다. 불과 두세 걸음이면 건널 수 있을 만큼 짧아서 다리라기 보단 거의 사각형 콘크리트 박스에 가까운 구조. 비가 내린 후여서 밑으론 개울물이 사곡만으로 쉴 새 없이 흘러들어 간다. 해안 쪽 경사면에는 돌계단이 만들어져 물 빠진 바닷가를 걸어볼 수도 있다.

여기서부턴 산책로 분위기가 살짝 달라진다. 제법 큰 조경석이 길을 따라 놓여 걷기에 좀 더 아늑한 인상을 준다. 어느새 따스해진 봄바람은 갯내음까지 머금어 싱그럽기 그지없다. 다만 해안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진 ‘불순물’(쓰레기)들이 한껏 오른 기분에다 청정해역까지 망치려 드는 게 아쉽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엔 울타리를 두른 체육시설 ‘사곡 인라인 스케이트장’이 자리해 있다. 바닥에 빨간색을 입힌 타원형의 경사진 트랙이 크게 한바퀴를 돌고, 안쪽엔 나무데크가 깔린 휴식공간도 마련돼 있다. 주말과 휴일이면 인라인을 즐기는 동호인과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사곡만을 배경으로 안전하게 인라인의 속도를 만끽할 수 있는 전용 놀이터인 셈이다.

이곳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사곡요트장이 나온다. 앞쪽은 백사장을 낀 사곡해수욕장. 사곡만이 레포츠의 메카로 거듭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뭍에 올려진 채 때를 기다리는 모터보트와 요트에 눈길이 간다. 해수욕장 모래 위에선 갈매기 수십 여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이 이채롭다. 마치 한 부분만 흰색으로 덮인 듯 하다.

요트장과 해수욕장을 거쳐 아스팔트가 포장된 도로로 올라선다. 이번 걷기의 종착지 사곡마을로 가기 위해서다. 원래 앞바다가 얕아 모래가 많아서 ‘모래실’이라 했는데 한자로 사곡(沙谷)이 되었다고 한다. 사곡마을로 가는 길이 다름 아닌 모래실길. 쭉 뻗은 도로 우측에는 경사진 논이 전봇대와 함께 펼쳐지고, 왼편엔 사곡만의 해안선이 따라온다.

사곡천의 황토 섞인 개울물이 바닷물과 어우러지며 내는 빛깔이 늦은 오후 햇살에 부서지며 오묘한 색으로 물든다. 옥색(玉色)인 듯 하면서도 걸음을 옮기면 달리 보이는 게 신기하다.
가는 도중에 소하천(小河川)을 하나 건너는데 이름부터가 작은 ‘사곡작은천’(길이 754m)이다. 다리를 넘어 계속 걸으면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해안을 따라 집들이 터를 잡은 사곡마을 어귀가 나타난다.

마을로 들어서면 여느 어촌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적한 풍경이 도보객을 반긴다. 십여 척의 고깃배들이 부둣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걷는 동안 바닷바람이 거세진 탓에 실려 오는 갯내음도 덩달아 짙어졌지만 천연방향제마냥 살갑게 느껴진다.

이동열기자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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