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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이정순
잠을 놓친 밤이다. 가끔 있는 일로 초저녁잠을 자고 나서 억지 잠을 청하기보다 아예 포기 해 버린다. 뒤척거리다 보면 머릿속만 더 복잡해 질뿐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새벽하늘이 궁금했다.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의 눈치를 보며 까치발로 베란다 문을 조심스레 연다. 음력 11월 초순의 눈썹달은 보이지 않고 쏟아질 듯 영롱한 별만이 추위를 견디며 새벽을 지킨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바깥과 실내의 급격한 기온 차이를 견딜 만큼 낭만적이지 못하니 잠시도 밖에서는 머물 재간이 없다.

돌아 와 책상 앞에 앉는다. 12월의 하얀 겨울답게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자동차 바퀴 소리만 적요를 깬다. 이 야심한 밤에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선뜻 떠오르지는 않고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 뿐 심한 글벙어리가 된다.

자판기에 손을 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책꽂이 에 시선이 꽃인다. 뽑아 보니 딱 작년 이 맘 때의 복잡했던 심정이 토로 되어 있는 미니 노트다.

작년의 오늘 나 자신에게 무엇을 약속한 것도 안 보인다. 다만 내년의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점을 남기며 나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내용이다. 나이라는 것이 삶의 무상과 개인의 정체성이면서 사회가 매기는 숫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내용도 있다.

혼자서 빙그레 웃은 건 나는 이미 그 작년이 그리워진 오늘로 떠밀려 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해마다 년 말이면 더욱 나이에 짓눌린다. 언제부턴가 이력서 제출의 한계는 걸려 버린 지 오래고 간단한 신청서라도 작성 하려면 이름 적는 공간 옆에 나이를 기입하는 난이 꼭 있기 마련이다.

어느 고대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조용히 받아들이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용감하게 바꿔보라고 했다. 시간에도 흐르는 말이 있다고 보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과 보이지 않는 전쟁 같은 결과다. 연결 고리 같은 일상의 말없는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다만 아무나 알아듣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앞날을 예측은 못하지만 밀려오게 되어 있다. 노랑 저고리에 분내 나는 나이는 벌써 비켜 갔지만 인정할 것과 가꿀 것에 대하여 여유를 갖고 가슴을 데우면 삶이 조금은 윤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니 언제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일에도 반이 넘어 서 있을 때 많았으니 끝도 시작도 꼭 선을 그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생의 마지막 호칭으로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살 것이다. 하지만 견뎌온 격정의 세월을 주름으로 평가해도 될 만큼 가볍지는 않다. 그래서 후회나 미련도 없다. 다만 불필요한 과거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도 않다. 전부라고 묶을 수는 없어도 가능하면 기억 하고 싶은 것들만 기억하는 돌파구를 찾고 싶다.

나는 나이 오십을 넘어서 오히려 잃어 버렸던 웃음을 다시 찾았다. 뜻하지 못했던 일로 아침마다 눈 뜨는 것이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암울하게 겉돌며 의식의 틀에 스스로 구속되어 늘 괴로웠다. 그러나 슬픔과 행복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감정이란 걸 어느 날 깨달으면서 나를 추스르게 되었다.

깊은 수렁에서 나를 건져 올리기까지 나와 따뜻한 정을 나눈 사람들을 헤아린다. 살아가면서 무수한 인연을 만나고 또 흘려보낸다. 지금 알고 있는 내 좋은 사람들을 생애 마지막까지 같이 가게 해 달라고 메모 하면서도 끝내 쉰둘의 나이가 무겁기만 하다.

새거제신문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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