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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나는 곳, 새로운 길을 만나다- 공곶이오솔길 따라 언덕 오르면 눈앞엔 '비밀의 화원'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은 있다. 새로운 공간으로 발걸음을 잇게 하는 길이 하나쯤은 있는 법. 거제도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공곶(鞏串)이로 가는 길이 그런 존재다. 길이 끝난 자리에선 보이지 않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공곶이로 가려면 우선 와현을 거쳐야 한다. 지세포에서 와현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누우래재. 아래로 난 길을 밟아 해변 근처에 다다르면 공곶이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아늑한 포구마을 예구(曳龜)에 닿는다.

본래는 왜구, 왜구미, 외기미라 했는데 일본 어선이나 왜구들이 침범해 그리 불렀다 한다. 그러던 것이 고종 때인 1889년 한일통어장정(韓日通漁章程)으로 일본어선 예인망(曳引網)이 들어와 지금의 예구가 됐다는 문헌의 설명.


차로 갈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다. 이제부턴 발품을 파는 수밖에. 해안선을 따라 갯바위를 타고 넘어도 되지만, 위험하거니와 무턱대고 시도하기엔 상당히 버거운 난코스다. 포구 끝 뒤편으로 난 제법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일부를 시멘트로 덮은 널찍한 임도가 최근 뚫렸지만 구불구불한 좁은 흙길이 걷기엔 제격일 터. 어느새 가빠진 숨을 고르며 뒤돌아본 예구의 풍경이 그림 같다.

더러는 새로 난 임도 덕에 차를 몰고 언덕을 곧장 오르는 경우도 있는데, 아직 걷기의 참맛을 모르는 이들이 범하는 실수다. 두 다리는 편하겠지만 여유를 즐기며 얻는 진짜 재미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때론 불편한 것이 더 나은 때도 있는 법이다.


걸음을 재촉해 언덕에 서자 눈앞에 비경이 펼쳐진다. 비로소 계단식으로 잘 정리된 농원 공곶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부러 산 뒤편에 숨겨놓은 듯 깊이 들어서 있어 ‘비밀의 화원’으로 불러도 손색없을 것 같다. 발아래 놓인 남도의 절경은 그야말로 장관. 안섬(내도)이 손에 잡힐 듯 반기고, 멀리 해금강도 아련히 손짓한다.

언덕 아래 공동묘지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공곶이의 시작을 알리는 동백터널과 마주한다. 내리막 경사가 심해 터널 끝을 보는 게 쉽지 않을 정도. 바닥에는 300개가 넘는 돌계단이 깔려있다. 겨울의 문턱으로 막 들어선 탓인지 인상적인 ‘레드카펫’은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꽃망울 터트린 붉은 동백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동백은 이듬해 봄까지 피고 지길 반복하면서 떨어진 잎이 융단처럼 꽃길을 이룬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동백이 떠난 자리를 노란 수선화가 대신한다. 해마다 이곳에선 꽃의 향연의 벌어지는 셈이다.


공곶이는 강명식(77)·지상악(73) 부부가 40년을 바쳐 일궈낸 작품이다. 몇 해 전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고, 거제8경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1957년 이곳에 터를 잡은 부부는 산비탈에 계단식 밭을 일궈 나무와 꽃을 심었는데 일일이 손으로 가꾼 까닭에 자연미가 살아 넘친다.

농원 규모 역시 상당하다. 14만8000여㎡ 가운데 3만3000여㎡(1만평)를 경작한다. 노부부의 손길이 닿은 나무와 꽃은 50여종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동백나무만 해도 50종이 넘는다.
울창한 동백터널은 하늘도 가릴 만큼 빽빽하다. 양쪽 산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밭에는 수선화, 종려나무, 조팝나무 등이 자란다.


긴 동백터널을 지나 종려나무숲 사이 돌담길을 따라가면 바닷가 몽돌해변이 나온다. 깎아 논 밤톨 같은 학동의 몽돌과는 모양과 색이 사뭇 다르다. 이름 모를 도보꾼들이 만들어 놓고 간 몇 개의 돌탑도 인상적이다. 특히 방풍벽 역할을 하는 해안 돌담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풍광을 그려낸다.

게다가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하는 공곶이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건 외지인에겐 행운이다. 부부가 먹고 살기 위해 조성한 삶의 터전이라 입장료가 없는 것. 공곶이가 더없이 값진 이유 중 하나다.



공곶이의 지명과 유래

1872년에 제작된 ‘지세진지도’에는 공곶리(共串里)로 표시돼 있어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공곶이는 해안선의 생긴 모양이 배의 치와 같다하여 치끝바위가 있다. 건너편 내도 주민들이 육지를 오갈 때 그곳을 나루터로 이용했다. 묶을 공(鞏)자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하여 송곳 곶(串)자를 써 공곶이라고 한다.

선사시대 쓰던 석기와 오래된 토기 그리고 패총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랜 날부터 사람이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지금부터 약 150~200년 전 당시 예구마을에 약 5가구가 살았다는데 주(朱)씨라는 사람이 공곶이에 살기 위해 가보니 기와집이 있고, 말을 멘 자리가 여러 곳에 있었으며 해변 돌밭에는 유골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930년경에 발행한 ‘거제도 천주교 연혁’에 의하면 1880년 부산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하려고 거제도에 건너와 지리끝(서이말등대)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해산물이 풍부한 공곶이에 자주 와 그곳에 살고 있던 주관옥이라는 사람을 도와주며 지냈다고 한다.

특히 공곶이와 서이말 구간에는 공곶이 자갈굼터, 공곶이 치끝, 물앞느렁, 공곶이 물앞, 가매느렁새여, 천스구미, 자갈밭 솟느렁, 이망바지(아이업은 여), 돼지 강정 내리 닿는 곳 등의 재미난 지명이 많다.
안섬(內島)은 조선시대 내조라도(內助羅島), 조라도 등으로 불렸다. 면적은 25만8476㎡. 구조라초등학교 내도분교가 있었으나 1998년 9월 1일 폐교됐다. 주민은 9세대 약 13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대부분이 노령이다.


이동열기자  saegeoj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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